스포츠일기

아무도 안 보는 여자축구 경기를 내가 직접 중계해봤다

목살구이 2026. 9. 16. 15:17

관중 스물세 명, 삼각대 하나로 시작한 중계

지난 주, 인적 드문 그라운드 한켠에 삼각대 하나와 휴대폰 마이크를 놓고 앉았다. 내가 맡은 상대는 유튜브 조회수도 방송사 카메라도 없는 여자축구 경기였다. 킥오프 5분 전까지도 중계를 정말 해도 되는 건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평소 나는 부스 안에서 이미 짜인 큐시트를 따라 목소리만 얹으면 됐지만, 이번엔 대본도 PD도 리허설도 없었다. 그래도 해보고 싶었다. 관중석이 텅 빈 경기일수록 오히려 그 소리를 누군가는 담아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장비를 챙겨 간 이유

여자축구 중계가 본 방송 편성에서 밀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이 리그는 이번 시즌 들어서만 벌써 다섯 번째로 카메라 한 대 없이 끝난 경기를 기록 중이었다. 결과만 스코어보드로 남고, 그날 그라운드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간다. 이런 경기를 우연히 스쳐본 사람이라면 그 흔한 스코어 한 줄 뒤에 어떤 장면이 있었는지 모른 채 넘어가기 쉽다.

그래서 나는 이번엔 직접 장비를 챙겼다. 방송국 허가도 팀 앰비션도 없이 관중석 맨 위 칸에 자리를 잡고 스마트폰 하나로 스트리밍을 켰다. 동시 접속자는 많을 때도 마흔일곱 명을 넘지 않았지만, 그중 몇 명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채팅창에 남아 있었다. 내가 이 정도의 관심도 없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경기가 끝난 뒤 댓글로 다음 경기 일정을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질문 하나에 이 시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라운드에서 들려오는 것들

마이크를 잡고 나서야 알았다. 평소 부스 안에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그라운드 바로 옆에서는 다 들린다. 골키퍼가 수비진에게 소리치는 목소리, 코너킥 앞에서 코치가 외치는 지시, 공이 골대를 맞고 튕겨 나가는 둔탁한 소리까지. '거기 서, 거기!'라는 외침 하나가 수비 라인을 통째로 바꾸는 순간을 마이크 너머로 그대로 전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상대 팀 벤치에서 들려온 잡담까지 마이크에 그대로 잡혀, 편집 없이 내보낸 뒤에야 방음이 얼마나 허술한 환경인지 깨달았다.

경기 후반 20분께 관중은 스물세 명이었다. 응원가도 대형 스피커도 없었지만 그 스물세 명의 박수 소리는 카메라 열 대짜리 경기 못지않게 선명하게 잡혔다. 다만 바람이 세게 불던 순간엔 마이크가 그 소리까지 그대로 삼켜 중계가 몇 초 끊기기도 했다. 직접 폰 하나로 중계를 시도해본 사람이라면 이 소음부터 먼저 걸릴 것이다.

 

 

판정 하나에 목소리가 흔들렸다

후반 32분, 결정적인 장면에서 오프사이드 깃발이 올라갔다. 리플레이도 VAR도 없는 경기라 판정은 오롯이 선심 한 명의 눈에 달려 있었다. 순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내 말이 한 박자 늦게 나갔다. 나중에 국제축구평의회(IFAB)가 공개한 오프사이드 규정 원문을 다시 찾아본 뒤에야 그 판정이 왜 정확했는지 이해했다.

해설을 업으로 삼아도 현장에서는 규정을 되짚을 시간이 없다. 판정 하나에 흔들리는 목소리를 듣던 시청자 몇 명은 채팅으로 '지금 오프사이드 맞아요?'라고 되물었다.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는 게 이번 중계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이다.

 

 

혼자 중계하며 저지른 흔한 실수들

돌아보면 이날 내가 저지른 실수는 오프사이드 판정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하프타임에 전광판 안내가 없다 보니 추가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야 했는데, 두 번이나 숫자를 놓쳐 엉뚱한 시점에 휘슬을 예고했다. 특히 교체 선수 명단을 놓쳐 이미 들어온 선수를 엉뚱한 이름으로 두 번이나 불렀던 순간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혼자 중계를 해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 세 가지부터 챙기라고 말하고 싶다. 양 팀 명단을 미리 인쇄해 갈 것, 추가시간 타이머를 따로 켜둘 것, 배터리를 최소 두 개는 챙길 것. 나는 이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카메라 앞에 앉았다.

 

 

이 선수들도 언젠가

그라운드를 뛰던 선수 중 몇 명은 유소년 대표팀 출신이라고 본인 입으로 말했다. 이런 무명 경기에서 뛰는 선수들이 몇 년 뒤 태극마크를 달 수도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중계하는 내 태도가 달라졌다. 한국 여자축구의 현재 순위는 FIFA 공식 여자 랭킹 페이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큰 무대의 랭킹 숫자와 이날의 텅 빈 관중석은 같은 리그, 같은 선수들의 두 얼굴이다. 그 간극을 직접 보고 나니 무명 경기를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당장 눈앞의 무명 경기를 가볍게 다루면, 그 선수가 몇 년 뒤 국가대표로 뛸 때도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름 하나, 등번호 하나까지 챙겨 부르는 게 이제는 이 중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

후반 32분 오프사이드 판정, 채팅창에 남은 질문 하나

다시 한다면

다음엔 두 가지를 바꾸고 싶다. 먼저 양 팀 선수 명단과 최근 경기 기록을 미리 뽑아가는 것. 이번엔 즉석에서 이름을 확인하느라 몇 번 놓쳤다. 다음 경기 일정과 결과는 경기 일정 및 결과에서 미리 살펴 준비해두려 한다.

혼자 하는 중계는 장비보다 준비가 전부라는 걸 이번에 배웠다. 다음번엔 오프사이드 라인이 잘 보이는 자리를 미리 답사해서 앉을 생각이다. 그리고 삼각대를 하나 더 챙겨서 골대 반대편 앵글도 잡아볼 생각이다. 마이크 바람막이도 이번엔 반드시 챙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우리 중 누군가는 이번 주말 근처에서 열리는 이름 없는 경기 하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카메라 없이도 그 경기의 소리를 담아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한다. 다음 경기도, 그다음 경기도, 나는 계속 마이크를 들고 갈 생각이다.